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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0

관리처분계획은 숫자로만 바뀌지 않는다

서울고등법원 2024누71048 판결은 재건축 실무에서 관리처분계획 변경을 둘러싼 분쟁을 단순한 의결정족수 문제로 축소해서 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사건에서 조합은 상가조합원들에게 지급하기로 한 상가기여 개발이익 910억원을 이후 관리처분계획변경안에서 약 326억원 수준으로 대폭 감액하였고, 이를 총회 결의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법원은 사안의 핵심을 숫자 조정의 적법성 자체가 아니라 그 숫자 조정이 과거 합의와 부속합의,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형성된 상가조합원들의 보호가치 있는 신뢰를 침해하였는지에 두었다. 정비사업 현장에서는 흔히 “총회만 다시 통과시키면 된다”는 식의 접근이 반복되는데, 이 판결은 그 사고방식이 얼마나 위험한지 정확히 짚고 있다.

법원이 실무자들에게 던지는 첫 번째 메시지는 조합 내부의 규범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는 점이다. 법원은 2020년 제2차 부속합의가 조합원 3분의 2 이상 동의를 거쳐 적어도 조합 내부적으로 업무집행기관을 구속하는 규범으로서 효력을 갖게 되었다고 보았다. 즉 조합이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가조합원들에게 910억 원이라는 확정된 개발이익을 지급하겠다는 틀을 스스로 만들고 다수 조합원도 그 승인에 참여하였다면 이후 조합은 그 합의를 쉽게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비사업은 장기간의 이해관계 조정 절차인 만큼 특정 시점에 상대방의 협조를 얻기 위해 제시한 조건이 나중에 상황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으로 축소될 수 있다고 본다면 앞으로 누구도 조합의 설명과 제안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이 판결에서 특히 중요한 대목은 추인결의의 한계를 분명히 한 부분이다. 법원은 의결정족수 미달이라는 형식적 하자는 소송 계속 중 이루어진 추인결의로 사후 치유될 여지가 크다고 보았다. 실제로 소송 중 2025년 12월 총회에서 관리처분계획변경안을 다시 의결하였고, 조합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였다. 그러나 법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관리처분계획의 내용 자체가 기존 합의와 부속합의에 기초한 신뢰를 침해하는 이상, 나중에 다시 다수결을 거쳤다는 사정만으로 그 실체적 하자까지 치유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절차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실체의 불공정을 세탁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신뢰보호원칙의 적용 방식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법원은 상가조합원들이 단지 막연한 기대를 품었던 것이 아니라, 조합과의 합의 및 총회 승인에 기초하여 충분히 보호가치 있는 신뢰를 형성했다고 보았다. 그 배경에는 당시 사업이 처한 시간 압박이 있었다. 재건축초과이익환수와 분양가상한제 적용을 피하기 위해 조속한 사업 진행이 필요했고, 상가조합원들 역시 장기간 영업중단과 이전 부담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금전적 보상이 사실상 불가결한 상황이었다. 그런 조건 아래 조합이 상가조합원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910억 원 지급 구조를 약속하고, 그 약속이 총회 승인을 통해 내부 규범 수준으로 굳어졌다면, 뒤늦게 관리처분계획에서 이를 대폭 축소하는 것은 단순한 재산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 침해의 문제라는 것이다.

조합 측이 자주 내세우는 형평 논리도 이 판결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조합은 상가조합원에게 별도의 개발이익을 지급하는 것이 조합원 평등원칙에 반하거나, 적어도 관리처분계획상 산정된 액수만 지급하면 충분하다고 주장하기 쉽다. 하지만 법원은 상가조합원과 아파트조합원이 동일한 조건에 놓여 있지 않다는 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특히 이 사건에서는 상가조합원들이 신축 상가의 대지면적 감소 등 추가 불이익까지 부담하게 되는 구조였고, 조합 역시 그런 현실을 알았기 때문에 별도의 개발이익 지급 약정을 체결했던 것이다. 외형상 동일한 조합원이라고 하여 모든 보상 구조를 기계적으로 같게 취급하는 것은 오히려 실질적 불평등이 될 수 있다.

실무상 더 뼈아픈 부분은 법원이 조합의 주장 변경 과정까지 유심히 보았다는 점이다. 판결문에는 조합이 상가기여 개발이익 액수를 소송 단계마다 326억 원, 210.5억 원, 141.6억 원 등으로 달리 주장한 사정이 적시되어 있다. 이는 결국 조합 스스로도 감액의 근거와 산정 방식에 대해 충분히 정리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정비사업 분쟁에서 금액 산정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 뒤의 법리 주장은 설득력을 잃기 쉽다. 법원은 숫자 자체보다도 그 숫자가 형성된 과정의 투명성과 일관성을 보기 때문이다. 충분한 협의 없이 먼저 결론을 정해 놓고 나중에 근거를 맞추려는 방식은 관리처분계획과 같이 조합원 재산권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영역에서 특히 위험하다.

결국 이번 판결이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정비사업에서 관리처분계획은 사업성만으로 작성되는 문서가 아니라, 그 이전 단계에서 축적된 합의와 설명, 승인, 협조, 그리고 신뢰의 총합 위에서 성립하는 최종 설계도라는 점이다. 조합이 필요할 때는 특정 집단의 협조를 얻기 위해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고, 사업이 가시화된 뒤에는 다수결과 사업성 논리를 앞세워 그 조건을 후퇴시키는 방식은 더 이상 쉽게 허용되기 어렵다. 실무자는 이 판결을 단순히 상가조합원 사건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이는 향후 재개발·재건축 전반에서 조합이 과거 합의와 내부 규범을 변경하려 할 때 어떤 수준의 설명, 협의, 정당화가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기준점이기 때문이다. 사업을 빠르게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번 약속한 구조를 바꿀 때 법원이 납득할 수 있는 절차와 이유를 갖추는 일이다.

출처 : 위클리한국주택경제신문(https://www.arunews.com)